안녕하세요 오늘은 이베리아 반도 서쪽 위치하며 서쪽은 대서양, 북쪽은 스페인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포르투갈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어느 순간 동안 연합에 속했고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침공했지만 포르투갈의 땅은 사실적으로 정복되지 않아 스페인 왕국에 편입되지 않았습니다. 포르투갈의 육상 이웃은 스페인 뿐이며 훨씬 큰 나라입니다. 몇 세기 전에 스페인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였으며 신세계와 아시아에서 자신을 확장하여 강력한 군대와 해군으로 수호되는 대규모 해외 식민지를 보유했습니다. 그들의 전력을 고려할 때 대서양 연안에 구석진 작은 이웃이 왜 스페인에 의해 정복되지 않았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 배경과 포르투칼의 형성
이베리아 반도는 로마인들에 의해 "히스파니아"로 알려져 있었지만 서로 떨어진 지역에서 시작된 종교적 움직임인 이슬람이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초기 동로마와 페르시아에 대한 군사적 성공을 통해 아랍 왕조는 거대한 속도로 확장되어 7세기말에는 대서양까지 도달했습니다. 이 왕조들에서 종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며 칼리페이트에서 우위를 차지했습니다. 히스파니 아는 라틴어 언어와 문화를 가진 전 로마 주에 속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깊은 뿌리를 내렸습니다. 711년 4월 30일에 이슬람 장군 타리크 이븐 지아드가 지브롤터에 상륙한 후, 그의 캠페인 종료 시점에는 반도 대부분이 이슬람 통치하에 들어갔습니다. 이슬람은 8세기 이슬람 정복 이래로 히스파니아에 존재했으며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을 수용했습니다. 이 베르베르나 혹은 현지인들은 '알-안달루스'라고 불리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살았으며, 이슬람을 수용한 아랍인, 베르베르인, 혹은 현지인들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 나라로 성립되었으며 1128년에 킹덤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이는 아폰소 헨리케스가 이끄는 레콘키스타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한 결과였습니다. 12세기 초에 포르투갈은 포르투갈 왕국의 왕으로 자신을 선포한 아폰소 헨리케스에 의해 정식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이것은 1143년에 리옹의 알폰소 7세에 의해, 그리고 1179년에는 교황에 의해 인정받은 것이었습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연합
스페인의 역사는 1479년에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의 결합으로 시작되었지만, 단일 통일된 왕을 가진 것은 1516년이었습니다. 카스티야 분리 전쟁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포르투갈이 알폰소 5세의 왕비 요하나를 지원했고, 아라곤은 페르디난도 2세의 왕비 이사벨을 지원했다는 것입니다. 이사벨이 카스티야 여왕으로 인정되면서 만약 요하나가 이기면 포르투갈과 카스티야는 합쳐질 것이었고, 아라곤은 독립 왕국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전까지 "히스파니아"라는 단어는 오로지 이베리아 반도를 가리키는 지리적 위치로만 사용되었습니다. 1876년 헌법에서 처음으로 "스페인"이라는 이름을 채택했습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레콘키스타에서 동맹이었고, 이를 통해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 남쪽에서 이슬람 무어들로부터 땅을 되찾았습니다. 1249년까지 포르투갈의 재정복이 완료되었으며, 1492년에는 카스티야도 재정복을 완료했습니다. 1492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첫 번째 스페인 항해가 캐리비안으로 이루어지면서 두 국가는 새 세계에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인해 포르투갈은 가장 중요한 식민지인 브라질을 얻었습니다. 1578년에는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안 왕이 몰디브와 터키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였고, 후계자가 없어 대왕부인인 포르투갈의 헨리가 대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헨리도 후계자가 없어 큰 계승 위기를 일으켰고, 스페인의 필리프 2세와 크레도의 안토니오가 포르투갈 왕위를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포르투갈 성리 전쟁에서 스페인의 승리 이후에 필리프 2세가 1581년에 왕으로 세상에 오르면서 두 나라 간의 개인 연합인 이베리아 연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이베리아 연합은 1640년에 포르투갈 복원 전쟁이 시작되면서 거의 6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스페인에 대항하여 포르투갈은 브라간자 왕조 아래에서 왕국을 재설정했습니다. 18세기 전쟁 중에는 주로 유럽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큰 국가들에 의해 싸워졌으며,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일반적으로 서로 반대편에 있었습니다. 1762년에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공격했지만, 1777년에는 남아메리카 소유지의 국경을 놓고 두 나라 간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1801년의 오렌지 전쟁에서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스페인군이 공격하여 포르투갈을 침략했고, 이는 페닌슐라 전쟁의 전조로 여겨졌으며 바가체스 조약을 통해 일부 포르투갈 영토를 잃었고, 특히 올리벤 자를 잃었습니다.
포르투칼이 정복당하지 않은 이유
1807년에 스페인 왕과 프랑스 동맹이 성공적으로 포르투갈을 침공했지만, 프랑스는 두 나라를 지배하려고 결정하여 스페인 왕을 전복시키고 포르투갈 왕가를 브라질의 포르투갈 식민지로 탈출시켰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수세기 동안 처음으로 동맹을 맺었고, 영국 군과 동맹하여 1813년까지의 페닌슐라 전쟁을 통해 프랑스를 물리쳤습니다. 이처럼 포르투갈은 해안선을 따라 위치하고 있어 스페인의 육상 공격에 상대적으로 취약하지 않았으며 포르투갈은 대서양을 통해 유럽 대륙과 다른 대륙으로부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1128년부터 유지된 독립 왕국으로서 존재는 포르투갈 국민들은 오랜 역사 동안 독립을 유지해 온 자긍심을 가지고 일으켰으며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하여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또한 포르투칼은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세계적인 해양 강국으로서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고,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포르투갈은 처음에는 대서양을 탐험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었고, 성공적으로 그 지역을 탐험한 결과 아프리카가 사하라를 건너 아랍 세계의 주요 자원 공급원이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경제적 부는 주로 해외에서 왔으며, 대륙을 초점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대양 탐험 시대 동안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주로 새로운 영토에서 조사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무역은 돈을 벌기에 좋은 출처였고, 아시아나 아메리카에서 온 새로운 상품은 유럽 시장을 활기차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번영은 포르투갈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복잡한 지정학적 이유로 스페인의 강력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프랑스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경제에 큰 피해를 입혔지만,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명성도 훼손되었고, 페닌슐라 전쟁 종료 직후에는 두 나라가 자신의 식민지 제국을 잃어갔습니다. 19세기 초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의 연합에 대한 몇 가지 계획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실패했습니다. 1세기 이상에 걸쳐 포르투갈을 스페인에 편입시키기 위한 계획도 있었습니다. 스페인 내부 문제와 외부 요인들도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낸 요소들 중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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